[엔딩크레딧 성명서] 더 이상 비정규직 노동자를 죽이지 마라
: 故 오요안나 기상캐스터의 죽음에 부쳐
MBC 보도국 오요안나 기상캐스터가 직장내 괴롭힘으로 고통받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일이 뒤늦게 알려지면서 그 어느 때보다 큰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그동안 방송 비정규직 문제에 눈감았던 언론, 정치권을 포함한 각계 각층에서 방송 현장의 비정상적이고 불법적인 고용관계를 질타하고, 직장내 괴롭힘에 대한 사회적 인식 제고를 강력히 촉구하고 나섰다. 그런데 이번 사안을 가장 무겁게 받아들여야 할 사용자 MBC는 ‘세력들의 준동’, ‘MBC 흔들기’라는 후안무치한 말들로 유가족에게 상처를 안겼고, 자체 진상조사위원회를 꾸려 조사에 착수했지만 그 과정에서 유가족의 의견은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이 사건은 수십 년간 비용 절감, 노동법 적용 회피 등을 위해 비정규직을 남용하면서 뿌리깊은 신분상 위계와 서열, 차별과 불평등을 고착화했던 ‘비정규직 백화점’ 방송사에서 벌어진 또 하나의 비극이다. 고인의 유서와 유가족의 증언 등을 통해 고인의 1년치 급여가 1600만원에 불과했고 고인이 새벽방송을 위해 숙직실에서 3주를 지내야 했다는 사실 등이 밝혀졌고, 이는 그동안 수 차례 거론되었던 방송 비정규직들의 저임금, 열악한 노동 환경, 불안정한 고용의 문제가 여전히 전혀 해결되지 않았음을 재확인시켜줬다.
방송 제작 현장 노동 인권 개선을 위해 투쟁해온 ‘엔딩크레딧’은 이같은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MBC가 형식적인 면피성 조사가 아닌 실질적인 개선책을 마련, 시행할 것을 다음과 같이 촉구한다.
첫째, MBC는 불법 프리랜서 계약을 즉각 중단해야 한다.
지상파 방송사들은 그동안 상시 지속적인 업무에 종사하면서 ‘방송 프로그램 제작업’의 특수성상 필연적으로 사용자의 지휘 감독 아래 일할 수밖에 없는 절대 다수 인력들을 ‘근로자’가 아닌 ‘프리랜서’로 고용해왔다. 지상파 3사 중에서도 유독 MBC에서 ‘무늬만 프리랜서’ 고용 사례가 끊임없이 ‘불법’으로 판명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10여 년간 매일 새벽 3시에 출근해 생방송 원고를 작성했던 MBC 방송작가 2인이 최초로 근로기준법상 근로자성을 인정받았고, 이후 전국의 지역MBC에서 무늬만 프리랜서, 불법 파견 등에 맞선 법률 투쟁이 이어졌다. 지금도 춘천MBC, 광주MBC 등에서 부당해고 이후 근로기준법상 노동자성을 인정받기 위한 법적 싸움은 계속되고 있다. MBC에서 이들 프리랜서가 없으면 방송이 불가능할 정도로 이들은 핵심적인 업무를 수행하며 그 비중 또한 전체 종사자의 절반에 육박한다. 단지 사용자의 강요에 의한 형식상 프리랜서 계약을 체결했다는 이유로 대다수가 휴일, 연차휴가, 퇴직금, 4대 보험, 업무상 재해, 부당해고와 관련된 어떠한 권리도 보장받을 수 없는 기막힌 현실은 여전히 카메라 뒤에 감춰져 있다.
MBC는 지금이라도 기상캐스터를 비롯하여 근로실질이 근로자임이 명백한 모든 노동자들과의 불법 프리랜서 계약을 중단하고 정규직으로 직접 고용해야 한다.
둘째, MBC 내 모든 직군에 대한 직장내 괴롭힘 전수 조사를 실시하고 더 이상의 피해가 양산되지 않도록 관련 제도를 전면적으로 개선하라
이번 사건은 MBC 내부에서 무늬만 프리랜서들이 불법 부당한 피해를 입었을 때 정상적이고 상식적인 경로로 이를 올바르게 해결할 수 없음을 드러낸 사례다. 공채 정규직과 기간제, 파견, 도급, 프리랜서 고용 형태가 혼재되어 철저히 수직적인 위계가 형성된 조직 내에서 ‘프리랜서 계약서’는 신고조차 할 수 없게 만드는 족쇄로 작용했을 것이다.
단순히 취업규칙에 신고 대상 범위를 확대하는 등 조항을 신설하는 형식적 조치에서 끝나서는 안 된다. 우선 고용형태를 불문하고 MBC내 직장 내 괴롭힘 실태를 전수 조사하고 이후 모든 노동자들이 신고 이후 불이익을 우려하지 않고 안전하게 신고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구체적으로 마련해야 한다. 이미 대법원의 판결에서도 확인되었듯이 사용자는 고용 형태를 불문하고 사업장에서 일하는 노동자가 안전하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할 의무가 있다.
셋째, 고용노동부와 방송통신위원회 등 당국은 MBC가 실효성 있는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특별근로감독, 재허가 심사시 기준 강화 등 제대로 된 관리감독에 나서라.
수많은 무늬만 프리랜서들이 최근 몇 년간 노동법의 적용을 받아야 할 노동자가 맞다는 법적 판단을 받았음에도 지상파 방송사들이 안하무인격으로 꼼수 대응에 나선 데는 관리 감독 당국의 책임이 매우 크다.
고용노동부는 수십년간 방송현장의 불법적인 고용 관행을 방치해왔고, 프리랜서 노동자들의 권리를 철저히 외면해왔다. 수많은 무늬만 프리랜서들이 고용노동부 앞에서 “노동자가 아니니 권리를 주장할 수 없다”는 말을 듣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고용노동부는 MBC에 대한 특별근로감독을 실시해 이번 사건의 진실을 밝히고 방송사 불법 프리랜서 문제, 직장 내 괴롭힘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을 내놔야 한다.
또한 방송통신위원회는 윤석열 정권 들어 ‘지상파 재허가 심사’시 비정규직 고용 실태를 파악하고 이를 심사 기준에 넣겠다는 지침을 폐기했다. 방송사들이 프리랜서 비정규직 고용을 남발하면서 사용자로서 책임을 회피하고 있는데, 관리 감독해야 할 방통위가 면제부를 주고 있는 현실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방통위는 지금이라도 다시 재허가 심사조건에 비정규직 처우 개선 방안을 넣고 심사를 강화해야 한다. 더 이상의 희생과 비극을 막기 위해 방통위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치임을 명심해야 한다.
오늘은 CJB청주방송 故 이재학 피디의 5주기이다. 프리랜서라는 이유로 부당해고를 당하고 사측의 거짓말에 억울함을 호소했던 이재학 피디, 그 오랜 시간 직장내 괴롭힘을 겪으며 고통을 호소해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 밖에 없었던 오요안나 기상캐스터. 죽음으로서만 비정규직의 비참한 현실이 드러나는 상황에 비통함을 금할 수 없는 날들이다. 제2, 제3의 이재학과 오요안나가 있어서는 안 되기에 지금 우리 사회가 들끓고 있고 많은 사람들이 함께 분노하고 있다. 방송 현장을 바꾸기 위해, 프리랜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안전하게 건강하게 일할 수 있는 현장을 만들기 위해 함께 연대하고 싸워나가자.
2025년 2월 4일
방송을 만드는 사람들의 이름 엔딩크레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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